# 01
신성 28 가문인 그린그래스. 그린그래스 가문에는 아주 오래된 저주가 내려왔다. 그린그래스 가의 여식이 아이를 낳으면 요절할 것이다. 피에 새겨진 그 저주는 오직 그린그래스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여자아이에게만 나타났다.
그린그래스 가의 여식인 다프네와 아스토리아 역시 그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저주가 반드시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저주는 그린그래스에게 드리워졌고, 많은 그린그래스가 피의 저주로 죽었다.
이 피의 저주는 그린그래스 아이들의 노년뿐만 아니라 유년기부터 괴롭히곤 했다.
저주 때문인지 그린그래스 가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그중 아스토리아는 유독 몸이 약했다. 잔병치레가 잦았고, 오래 걷거나 뛰면 금방 숨이 모자라 가슴을 움켜쥐어야 했다. 다프네 역시 몸이 약했지만 자신보다 더 약한 동생 때문에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사랑스럽지만 몸이 약한 막내. 가족들의 과보호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02
"아이테르가 딸을 낳았어. 아이는 갖지 말라고 그리 말했는데, 빌어먹을 이 저주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게 될 거야."
언니인 다프네는 저주에 예민했다. 사랑 같은 건 하지 말라 했고, 아이를 낳는 건 꿈도 꾸지 말라 했다. 지독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이 저주를 누군가는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린그래스 가문에는 반드시 한 명의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마치 이 저주를 끝내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이 그린그래스 가문은 그 대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
다프네는 이 저주를 자신의 대에서 끊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
장남이자 가문의 후계자인 아이테르가 결혼했을 때도 절대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지만 아이테르는 아이를 낳았고 다프네는 불같이 화를 냈다.
아스토리아는 그런 다프네를 다독였다.
"아이의 탄생을 기뻐해 주자. 저주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우리의 첫 조카니까. 순수하게 기뻐만 하자."
"아이의 눈동자는 또 초록색이야. 난 차라리 올가의 푸른눈을 닮기 바랐어."
아이의 이름은 클로리스였다. 꽃의 여신의 이름을 딴 그 아이는 정말 꽃처럼 어여뻤다.
아스토리아는 자신의 조카를 마주하고 벅차오르는 그 감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클로리스는 아이테르와 올가의 예쁜 점만 쏙 빼닮아 있었다.
아이를 보며 아스토리아는 생각했다. 자신도 사랑하는 이를 만나 그 사람과 자신을 빼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고. 분명 다프네가 들으면 또 불같이 화를 낼만한 생각이었다.
#03
"조심해."
시작은 아주 작은, 보잘것없는 친절이었다. 제 앞에 건네진 손수건 한 장에 아스토리아는 제 마음을 모조리 빼앗겨 버렸다.
다프네와 동급생인 말포이 가문의 외아들. 드레이코 말포이. 그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순혈 가문의 모임에서, 학교에서, 집안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들어왔다. 직접 마주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스토리아는 몸이 약해 가문의 모임에 자주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아스토리아는 수줍은 첫사랑을 이어나갔다. 상대는 신경도 쓰지 않는 외로운 짝사랑이었다. 물론 아스토리아가 티내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설혹 티를 냈다고 해도 그리 달라지는 건 없었을 터였다. 슬리데린의 왕자님(유치했지만 어린 학생들 사이에선 그렇게 불리곤 했다)에 핑크빛 마음을 품은 이가 어디 한둘이던가.
그래서 아스토리아는 수줍은 그 마음을 꼭꼭 숨겼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커져만 갔다. 자신이 그리핀도르였다면 용감하게 혹은 무모하게 그에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리핀도르였다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했을 게 분명했기에 아스토리아는 자신이 슬리데린인 것에 감사했다.
이대로 조용히 바라만 보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마음을 키워가던 어느 날,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자가 돌아왔다. 아스토리아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럼,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스토리아는 제 외사랑의 안위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학교를 떠나야 했다.
#04
"아스토리아는 너무 어려요."
아스토리아가 제발 학교로 돌려보내 달라고 할 때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온 다프네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사랑 받는 막내였다. 그린그래스 부부가 아끼는 딸이었고, 아이테르와 다프네가 애지중지하는 동생이었다. 그들의 눈에 아스토리아는 지켜줘야 하는 어린 아이일 뿐이었다. 아스토리아는 전쟁의 순간 가문의 가장 안전한 곳에 숨어있었다. 아니, 갇혀 있었다. 그린그래스 가는 어느 쪽에도 붙지 않았다. 죽음을 먹는 자들에겐 가담하지 않는다 압박 받았고,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는 함께 맞서 싸우지 않는다 비난 받았다. 그린그래스는 그 사이에서 꿋꿋하게 일신의 안위만을 꾀했다.
아스토리아는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다. 살인은 무거운 범죄였다. 영혼이 찢어지는 무서운 짓이었다. 그가 믿고 따랐던 순수혈통 주의자들은 그를 앞세워 머글 출신 마법사를 잔인하게 죽였다. 아스토리아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떳떳했고, 용서 받아서는 안 되는 살인의 이유를 그들이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말했다. 순수란 무엇인가, 순수혈통은 정말 모두 순수한가. 오로지 마법사만으로 이루어졌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아스토리아는 끝없이 질문을 던졌다.
순수혈통 우월주의자들이 하는 짓이 부조리하다고 느꼈다. 타인의 삶을, 생명을 짓밟을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것이 마법사든, 그들이 천하다 말하는 머글이든, 생명은 존중 받아야 했다.
아스토리아는 기꺼이 전쟁에 참여해 그들에게 맞서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그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국의 데스이터들을 피해 프랑스로 몸을 피했다. 아스토리아는 항의 했다. 방에 갇혀 나가게 해달라 말했다. 싸우게 해달라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주 깊숙한 곳에서 아스토리아는 안심하고 있었다. 두려운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더 편하게 만들어 준 건 그 행위에 자신의 의지는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05
클로리스의 동생이 태어났다. 클로리스가 태어난 지 2년이 지난 해였고, 전쟁이 끝난 해였다.
"저주란 놈이 어찌나 똑똑한지 좀 봐. 이번엔 아들이야. 또 이 지긋지긋한 저주가 이어질 거야. 그린그래스라는 이름은 이번에도 마법사 세계에서 그 지긋한 생을 이어갈 거야."
아스토리아는 이번에도 다프네를 다독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잔뜩 성이 난 언니를 토닥이는 것 외엔 없었다. 아이의 이름은 프리아포스였다. 아이테르와 올가를 반반 빼닮은 클로리스와 달리 아이테르를 축소해 놓은 것처럼 아이는 아이테르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아이란 어쩜 이리 신기한 건지. 아스토리아는 처음도 아닌데 여전히 조카가, 아이가 신비로웠다.
#06
전쟁이 끝났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뻔뻔하게 돌아와 승리자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구역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입을 다물고 웃는 걸 택했다.
아, 그 사람이다. 그 사람도 돌아왔구나. 반가운 마음이 차올랐다.
멀쩡한 척,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척, 척, 척. 온통 거짓과 가식으로 꾸며낸 아스토리아의 얼굴에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